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작서의 변 (문단 편집) === 가작인두의 변 === 작서의 변이 일어나고 6년 뒤, 유생 이종익이 사형을 받고 1년이 지난 중종 28년(1533) 5월 17일, 동궁의 남쪽 파자(把子) 울타리에서 또다시 저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종이로 사람 머리를 만들어 눈·코·입과 머리카락을 그리고 목패에 꽂았는데, 앞면에는 세 줄로 아래 내용이 한자로 쓰여 있었다. >[ruby(猶, ruby=유)][ruby(世, ruby=세)][ruby(子, ruby=자)][ruby(身, ruby=신)], [ruby(陵, ruby=릉)][ruby(遲, ruby=지)][ruby(爲, ruby=위)][ruby(乎, ruby=호)][ruby(事, ruby=사)] >[ruby(猶, ruby=유)][ruby(世, ruby=세)][ruby(子, ruby=자)][ruby(父, ruby=부)][ruby(主, ruby=주)][ruby(身, ruby=신)][ruby(乙, ruby=을)], [ruby(絞, ruby=교)][ruby(爲, ruby=위)][ruby(乎, ruby=호)][ruby(事, ruby=사)] >[ruby(猶, ruby=유)][ruby(中, ruby=중)][ruby(宮, ruby=궁)][ruby(身, ruby=신)][ruby(乙, ruby=을)], [ruby(斬, ruby=참)][ruby(爲, ruby=위)][ruby(乎, ruby=호)][ruby(事, ruby=사)]。 >---- >이처럼 세자를 [[능지형|능지]]하고 >이처럼 세자의 아버지 임금을 [[교살]]하며 >이처럼 중궁(문정왕후)을 [[참수형|참(斬)]]할 것 뒷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五月十六日, 兵曹書吏韓忠輔等十五人爲白乎事。 >---- >5월 16일, 병조(兵曹) 서리(胥吏) 한충보(韓忠輔) 등 15인이 행한 일임 이 사건을 '사람의 머리 모양으로 만들었다(假作人頭).' 하여 '가작인두(假作人頭)의 변(變)', 또는 목패(木牌)에 꽂혀 있었다 하여 '목패의 변'이라고 부른다. 상식적으로 궁중에 대놓고 왕과 왕비와 왕세자를 [[저주]]하는 물건을 가져다 놓고 '내가 했소.' 하고 적어둘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조정은 목패에 이름이 씐 '[[병조]] 서리 한충보'를 모함함으로써 이득을 볼 만한 사람을 위주로 조사했다. 하지만 소득이 없자 한충보를 조사했는데, 그가 언급한 다른 사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당성위(唐城尉) 홍여(洪礪)의 하인들이 실행범이라는 자백이 나왔다. 홍여는 폐서인된 경빈 박씨의 둘째 딸 [[혜정옹주|혜정옹주(惠靜翁主)]]의 남편이다. 홍여의 하인들이 자기 주인의 명령을 받아 임금과 세자를 저주하는 가작인두를 만들어 목패에 꽂아 설치했다는 것이다. 하인들의 집에서는 저주에 쓰인 목패와 재질이 같은 널빤지가 나왔다. 중종은 가작인두의 변이 박씨에게 잘 보이려 한 무리들이 벌인 짓이라며 경빈 박씨에게 [[5월 23일]] 사약을 내렸지만, 아들 복성군은 어머니가 연루되었을 뿐 그 자신은 관련이 없으니 멀리 안치시키라고만 하였다. 경빈을 사사하고도 복성군까지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끊임없이 올라왔었는데 처음에는 중종도 상소가 올라올 때마다 18번이나 거절했었다고 한다.[* 나중에 복성군의 시신이라도 온전히 거두게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심 끝에 사흘 후 26일 복성군을 사사하고 두 옹주를 폐서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가작인두의 변을 교사했다는 혐의를 받은 홍여는 고문을 당하며 심문을 받았지만 혐의를 계속 부인하였는데, 결국 (중종이 복성군을 사사하라고 명령을 내린) 5월 26일 옥사하였다. 홍여의 아내 혜정옹주는 폐서인되어 작호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도성 밖으로 내쫓겼고, 시아버지 홍서주(洪敍疇)는 유배를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